인조반정 가계도 조선 16대 과연 그는 어떤 왕이었나?
인조 [ 仁祖 ]
조선의 제16대 임금. 본명은 이종(李倧).
출생-사망
1595 ~ 1649
재위기간
1623년~1649년
가족관계
왕비 인열왕후(仁烈王后), 장렬왕후(莊烈王后), 아버지 원종(元宗),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
사람들이 많이 찾는 유용한 정보
조선왕조의 네 번째 반정인 인조반정으로 백부 광해군과 지지세력인 북인(대북파) 일파를 축출하여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는 선조와 후궁 인빈 김씨의 5남인 정원군이며, 어머니는 연주군부인 구씨다. 정원군의 장남으로, 능양군으로 책봉되었다.
'반정'을 통한 인조(仁祖)의 집권은 실질적인 조선 제2왕조의 창건 및 조선 왕조의 중시조로 평가된다.
조선후기 300년 간 진행된 제도개혁의 논의는 인조 시대에 시작되었으며, 왕통상으로도 인조 이후 즉위한 조선의 임금은 마지막 군주인 순종까지 모두 인조의 직계후손들이다.
혈통상으로 고종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직 후손이다.
전술하듯 광해군은 물론 그 아들인 세자까지 장성한 상황에서, 능양군 이종의 왕위 계승순위는 없다시피 했으나 쿠데타(정변) 과정을 통해서 추대되어 왕이 되었다.
인조 가계도

이에 상당수의 실무자와 중립세력들이 협력(혹은 최소한 방조)한 것이 특징적이다. 정권 안정성이 높은 조선사에서, 인조반정이 군주를 교체한 조선 최후의 정변이 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청에서 시호를 받은 임금이지만 조선 조정은 조선전기와 마찬가지로 중국 왕조에서 내린 시호를 받기만 하고 실제로는 중국과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조선의 제16대 왕(재위 1623~1649).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 정책을 썼다.
난국 속에서도 군제를 정비해 총융청 · 수어청 등을 신설했으며, 북변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하여 여러 곳에 진을 신설했다.
《동사보편》등의 서적도 간행되었고, 송시열 · 송준길 등의 대학자·대정치가가 배출되기도 했다.
인조의 평가
인조는 본인이 몰아낸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는 평이 상당히 갈리는 편이었다. 과거처럼 비운의 군주로 다루는 평가는 거의 사라져, 대중적으로는 조선 최악의 암군이다.
그러나 의외로 광해군에 대비되는 긍정적인 면모도 일부 있어서 학계의 재평가도 있었으나, 그것이 지나치다는 평가도 공존하고 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인조 재평가는 오항녕의 것이나, 이 역시 지나치게 일변도적인 측면이 있어 주의를 요한다.
인조의 긍정적 평가
인조에 대한 재평가를 대중에게 처음 알린 것은 오항녕 교수의 평가로 알려져 있지만 오항녕 교수가 아니라도 이미 오래전부터 인조 시기 치세에 대한 연구는 다른 학자들 역시 심도 깊게 진행해 왔다.
권력의 쟁취와 전체적인 국가 안정 면에서 인조의 능력은 특별히 나쁘지 않았다. 특히 광해군이 벌여놓은 대규모 토목공사는 사대부와 백성들에게 모두 비판받았다.
그래서 인조는 토목 공사를 중단하고, 대동법 확대(즉위 초년에 강원도 확대)등 나름 능력을 발휘했다. 물론 확대했던 대부분의 지방은 1년 만에 강원도를 제외하고 취소했기에 강원도만 확대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경제사정은 대동법을 확대하기도 쉽지 않았다.
소현세자에 대한 박대도 실상 단순히 소현을 미워했다는 개인적인 악감정 이전에 청의 영향력이 소현세자에게 너무 큰 문제가 있었다.
강빈을 사사한 것도 이게 봉림대군을 위한 행동이었다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다. 소현세자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이 남지만, 만약 인조가 딱히 개입하지 않았다면 강빈 사사 자체는 후계자에 걸림돌이 되는 전 세자 세력에게 무자비한 숙청을 가한 것이 된다.
다만 이 숙청으로 정작 봉림대군은 본인뿐만 아니라 아들 손자까지 정통성에 치명적인 약점을 남기게 된다.
봉림대군이 옹립될 당시 김자점과 소용 조씨의 힘을 너무 키워주어 나중에 효종이 그들을 내쫓을 때 나라가 한바탕 난리가 난게 흠이라면 흠인데 이것도 효종이 즉위 후에 김자점을 순식간에 개박살내는 거 보면 과연 인조가 김자점에게 얼마나 권세를 몰아줬는지도 사실 의문이다.
뭐 김자점이나 소용 조씨 입장에서는 토사구팽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인조는 단순히 무능한 왕은 아니다. 스스로 반정에 성공하여 왕이 되었고, 인목대비의 명분을 바탕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원익, 최명길, 정충신 같은 중요 인사들도 보호해주었다.
즉, 정치적 세력의 안정과 관리의 측면에서는 광해군보다 확실히 나았다. 자기가 친 사고를 보며 통곡하거나 개선해야 한다는 의식도 가져서, 1623년 즉위 초의 대동법 개정, 1633년 상평통보 발행과, 1634년 3남 일대 양전, 군사개혁 같은 업적을 남겼다.
대외정세에 대해서도 신하들보다는 인조의 판단력이 그나마 우월한 수준이었다. 다만 즉위 초기에는 조명연합군을 박살낸 후금의 역량을 무시해 오랑캐 집단정도로 치부하거나, 병자호란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 선전포고 격문을 인조의 강짜로 보내는 등 판단력이 우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승정원일기에는 인조와 신료들이 명의 사정을 의논하는 대화들이 있다. 인조가 명나라에서 환관이 권세를 부리고 있다며 명나라를 침략하려 하는 후금의 발호를 걱정하자, 이정귀는 후금 외에 중국 내에서도 반드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명나라 내의 광범위한 부패에 대해 이야기한 뒤, 최내길은 명나라는 반드시 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1627년 5월 명나라에 다녀온 김상헌은 명나라는 후금을 토벌할 기세가 없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김지수는 심지어 중국인들이 명나라는 천명이 다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지수의 이 말에 인조는 "천조국의 일은 역시 한심스럽다"라고 답했다.
이후 인조는 명나라에 조공하는 나라들의 숫자가 줄었는지 묻자, 김상헌은 이에 "지금은 조공하는 자들이 없습니다"라고 답하는것에서 명나라가 희망이 없고 망할것임을 알게되었다.
인조실록에는 모두 첨삭되어 있는 이 기록들에서 볼 수 있듯, 인조와 신료들은 부패와 내란, 외침으로 몰락하고 있는 명나라의 현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런 명나라의 편에 서서 후금과 전쟁할 생각이 없었다. 이후에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전쟁이 난건 인조 책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인지부조화
현대의 인식이나 미디어에선 무능 이미지를 뒤집어 쓰는 왕이기도 하다. 하지만 광해군은 행정이나 경제 분야에 밝지 못하여, 선조의 중신들을 죽이고 임진왜란 이후의 국가상황을 인조 말기가 되어서야 회복될 정도로 악화시켰다.
일례로 광해군이 궁궐 예산을 메우기 위해서 매관매직을 허락한 결과, 궁핍한 백성들끼리 좋은 수령이 쫓겨나지 못하도록 돈을 모으는 등 전후복구와는 동떨어진 방향에서 국정이 엉망이었다.
특히 광해군은 백날천날 첩보원 보내서 홍타이지에 대해 문제의식 가지기만 했지 가장 중요한 국방비를 궁궐공사에 쏟아부어 낭비해버렸다.
정보수집을 해놓고도 국방에 쓸 화약까지 궁궐 기와 굽는데 쏟아부었던 것이다. 차라리 모르면 몰랐으니 실드라도 칠 수 있지 홍타이지의 대제국이 조선을 침략하려한다는 것도 다 알고 후금이 분명 훗날에 조선을 쳐들어올 수 있단것도 다 알면서도 쌀이고 돈이고 화약이고 궁궐에만 쏟아부었다.
광해군은 외교만으로 신하들에게 청나라 못 막는다고 징징거리기만 했지 제대로 막으려고 했다면 내치를 그렇게 엉망으로 해선 안되었다.
전후복구도 광해군은 그 흔해빠진 양전조차 실시할까 실시할까 하다가 결국 실시하지 않아서 인조대에 양전을 다시 실시했고 대동법은 주구장창 반대만 했다.
광해군이 전후복구라는 개념이 있었으면 임진왜란으로 망가진 나라에 궁궐을 뚝딱뚝딱 지어올리는 짓은 안했을 것이다.
정충신이나 장만 같은 인물들 뽑아서 북쪽에 올려놓아봤자 정작 한양에서는 북쪽으로 올려보내야 할 물자와 인력을 착실히 갉아먹고 있고 또 그렇다면 적어도 북쪽에 올려보내는 물자와 병사를 줄이던가 아니면 궁궐공사를 중단하든가 둘 중 하나를 했어야 하는데 광해군은 둘 다 실시해서 국력을 낭비하고 백성을 고혈을 갉아먹었다.
인조는 경제를 살피고 김육, 이원익 등의 실무자들을 방해하지는 않아, 정말 필요한 개혁 자체는 그럭저럭 진행했다. 덕분에 말년에는 국정 실패를 만회했고, 아들 효종부터는 그럭저럭 국가가 돌아가는 기틀을 물려주었다.
그러나 군사 쪽으로 정충신과 남이흥이 받은 고난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며, 이괄의 난 직후 후금에 대비해 방비책을 제시하는 둘을 면전에서 모욕을 주고 심지어 남이흥은 사실상 소모품 취급으로 사지로 몰아넣기까지 했다.
광해군의 실패를 딛고, 청나라 숭덕제에게 털리긴 했지만 정강의 변처럼 나라를 아예 멸망시키진 않았으며, 죽기 전에는 효종(세자) - 현종(세손)이라는 바른 선택으로 후계자들을 깔끔히 한 것이 인조의 최대 업적이다.
어쨌거나 왕조의 재건에 성공했고, "여민휴식與民休息" 정책을 통해서 경제와 민생을 모두 재건해낸 것이다. 즉, 인조의 치세는 외치나 인사 관리로 따지면 암군의 칭호를 절대 피하기 어려우나, 주목받지 않은 후반기에는 양란 전쟁의 여파를 막아내면서 숨을 돌릴 기회를 준 것으로 요약된다.
인조는 반정한 바로 그날에 영건, 나례, 화기 등 12개 도감을 폐지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던 조도사 6명과 제주 목사의 처형을 명했다. 이러한 조치는 어느 정도 정치적 과장이 있기는 하겠지만, 백성의 고통에 대한 반정세력의 응답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극심한 흉년으로 재정난이 예측되는 시점에 광해군의 조도성책을 불살랐던 것, 조도관이 민간에 흩어져 비축해둔 미, 포를 백성들에게 나눠주도록 지시했던 것도 그 연속선에 있는 조치였다.
또한 인조는 즉위 후 6개월 만에 민에게서 거둘 예정이었던 원곡 11만 수천 석을 삭감했다. 이 원곡은 진헌, 제향, 어공에 쓰일 예정이었는데, 광해군 13년 이전의 미납 공물이었다.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인조 말년 공식적인 공물가 원곡의 총량이 5만 석이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때 삭감된 양은 대단히 많은 것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급한 대로 이런 조치를 통해서나마 광해군대의 '일탈' 을 '정상화' 해야 했다.
예컨대 중국사에서는 명·청 교체기인 1640년대를 소빙기가 가장 활성화된 시기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한국사에서 소빙기의 충격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는 1670년 ~ 1700년 무렵이었다.
중국 역사학계가 1640년대를 소빙기의 충격이 가장 강력하게 발휘된 시기로 이해하는 까닭은 바로 이 무렵 왕조 교체를 포함한 대규모의 정치 경제적 변화가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같은 수준의 이상 저온의 충격을 받은 1640년대 즈음의 조선은 도리어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였다. 이는 인조 정권이 1636년 병자호란에서의 패배 이후 '여민휴식'을 모토로 긴축 재정, 세금 부담의 완화 등을 통해 농민들의 사회 경제적 안정을 위해 매진했던 덕분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조정은 여민휴식을 국정 운영 모토로 하여 국가재정 규모 감축, 긴축 재정, 세금 부담 완화 등의 조치를 시행한다. 그리고 광해군 대에 완전히 180도 돌아서 일탈했다가 병자호란 이후 여민휴식을 모토로 국정을 운영한다.
덕분에 중국이 왕조 교체라는 격변으로 이상 저온의 충격을 가장 강하게 받은 1640년대를 무사히 넘기고 제도사적으로 의미있는 논의들이 이뤄진다.
아무리 효종이 명군이라도 처음부터 기반없이 좋은 성과를 기대하긴 어려운 법이고 인조는 꽤 의미있는 성과들을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여민휴식이라는 것은 본래 중국 전한의 황로학파가 내세운 사상으로서 전한 초기 문제와 경제의 정책이었다. 여민휴식 정책은 왕실이 주도하는 철저한 절약과 절검, 농민들의 부세 부담을 3분의 1로 낮춰주는 과감한 경세 정책, 산림과 천택의 전면 개방, 형벌 완화 등에 정책의 초점을 맞췄으며 이는 한나라 초기의 상태가 임진왜란이 갓 끝난 조선의 그 것과 같다는 점에서 이뤄진 생각이었다.
선조는 임란 이후 이 정책을 실행했고 이 정책은 인조가 계승하여 효과를 거두게 된다. 효종 3년에, 전 판서 조경이 '중국의 능화지로 벽을 바르고 능단과 금수로 만든 옷을 해 입고, 최상의 말을 타고, 맛나고 기름진 음식을 먹는 풍조'가 서울 고관 뿐만 아니라 시정의 하층민들에게 까지 만연했다고 한탄하게 된다.
이런 정책은 현종 때까지 이어졌지만 민간에 대한 비개입은 점차 지배층의 부의 독점화와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한 사회 양극화 현상을 크게 일으켰으며 현종 말기부터 숙종 시대에 이르는 소빙기로 인한 기근의 연속은 더 이상 민간이 모든 것을 다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줬다.
이것은 숙종, 영조, 정조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왕권을 지닌 왕들이 등장하는 원인이 되는데.이는 한나라의 여민휴식 정책으로 호족이나 지주 계급이 성장했고 이로 인한 사회 양극화로 인해 한무제가 강력한 황권을 바탕으로 국가 주도, 국가의 사회 경제 개입과 법가적인 통치책을 쓴 것과 같은 흐름이었다.
또한 한명기 교수에 따르면 인조의 기본적인 외교 노선은 놀랍게도 병자호란 이전까지 광해군의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생각해보자.
의리를 떠나서 이익 관계로 생각해도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인데, 인조이든 광해군이든 기본적인 외교 노선은 '친명 정책을 유지하되, 청(후금) 자극은 자제'이다. 이는 과거 고려가 송나라와 요나라 사이에서 유지했던 노선과 똑같다.
왜냐하면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그 순간까지도 청나라는 산해관에서 막혀있었고, 정말 심각한 내분으로 명나라가 자폭하지 않는한 자력으로 청나라는 도저히 명나라를 끝장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과연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태였다. 물론 당시 명나라가 대체적으로 청나라에게 밀리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송나라는 그보다 더 심하게 털리면서도 압도적인 생산력으로 요나라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대세가 청나라이니 실리를 위해 청나라에 붙어야 한다는 것도 결국 후대의 결과론에 불과한 것이며[7], 조선의 입장에서는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또한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명나라의 멸망은 이자성의 난 때문이므로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기 어렵다고 본 조선의 판단은 들어맞았다.
이 반란의 성공은 청군 때문에 명의 전력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것에 원인이 있지만, 어쨌거나 청은 명나라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산해관에서 오삼계에게 막혀있었다.
더군다나 명나라는 남송으로 살아남은 송나라 때의 교훈을 살려 강남에 많은 물자와 지방군으로 이민족이나 반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문제는 이렇게 세워진 남명이 숭정제의 대책없는 자살과 후계의 불안정 때문에 내분이 일어나 망해버렸다.
따라서 조선이 참고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유사한 상황에 있었던 고려의 대응책이 된다.
물론 이괄의 난은 그의 실책이다. 정쟁에 의해 발생한 이괄의 난이 없었다면 정예군이 배치되었던 북쪽지역 방어가 허술하게 방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서북지역 군관들은 이괄의 난 이후로 역적으로 몰릴까봐 진법 훈련도 제대로 실시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인조의 부정적 평가
인조는 국가와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비전이 부족했다. 그리고 지도자의 결단이 필요한 순간에 가닥을 잡아주지 못했다. 자신의 등극 자체가 반정이었기 때문에 역모에 대한 불안감으로 북인 인사들도 많이 숙청하거나 죽였다. 특히 광해군 시절에 수많은 옥사로 경험했던 터라 반정 뒤에는 경계심이 편집증에 가까워졌다.
인조와 서인 정권의 경계로 인해서 북인들 중에서 권신이거나 실력자,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던 측근 세력들은 숙청됐다. 이이첨과 대북 세력들은 악행을 많이 저질렀기에 죽음을 당해야 마땅했지만, 류희분과 기자헌의 경우에는 서인들 내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죽었으며, 북인의 권신이었던 박승종은 아예 자결할 정도였다.
유몽인이 광해군을 복위하려 했다는 유응형의 모함을 받아들여 이미 폐모론에 반대해 조정을 떠나 재야에 은둔한지 오핼인 유몽인을 죽였다 경세가로 이름 높은 유형원은 아버지 유흠이 인조에 의해 연좌제로 역적 취급당하고 죽자 정치판의 막장스런 현실에 환멸감을 느끼고 재야로 내려갔다.
이러한 북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처벌로 반발이 일어났는데, 박홍구 유효립 임취정등이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복권시키고 인성군 같은 종친들을 왕으로 옹립할 거사를 꾸밀 정도였다 이후에도 북인잔당들은 후금과 내통하려 쌨던 양경홍의 역모사건과 정한추대사건[12]등을 꾸미는 등 인조 정권에 반격을 가하려 하였다
인조 시대의 인재풀은 쿠데타로 집권한 태종, 세조, 중종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으로 빈약하다. 게다가 대표적인 주화론자인 최명길이나 행정의 달인 김류 같은 인재를 보유하고도 제대로 활용 못하거나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 김류는 비실무직인 청요직을 역임했을 뿐이었다.
조선 시대에 유일하게 생원시, 진사시, 문과를 한해에 모두 급제한 괴수에 가까운 최명길은 신료로서 뛰어났는데, 인조 정권에서 군계일학의 현실주의자로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고, 그러면서도 청의 파병 요청을 극렬 반대하여 부결시켰으며, 명나라와 몰래 연락을 취해서 조선의 입장을 이해시키려 하고, 환향녀 박대에 반대하고, 강빈 사사도 반대하는 등 종종 인조의 뜻에 반하면서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고 결국은 축출당했다.
그마저도 인조 반정에 가담하여 왕위에 앉힌 무리 속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등용된 것이다. 다만 2번의 호란으로 트라우마를 입어 전쟁을 꺼리던 인조가 주화파인 그를 푸쉬를 해줬지만, 이는 같은 공신그룹이었던 심기원과 김자점을 인조가 더 총애하는 바람에 역시 마찬가지로 최명길은 당시 정승이었던 홍서봉, 심돈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다.
애당초 인조가 서인과 손잡고 광해군을 쫓아낸 이유가 가족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이었던 탓도 있다. "폐주보다 잘해보자. 그러니까 당쟁, 동기 살육은 안 돼" 정도의 관념은 있었어도, 태종이나 세조처럼 정권을 잡고 난 다음 나라를 어떻게 이끌겠다는 비전은 없었다.
그래도 왕이 된 후에는 재위 전반에는 신흠, 오윤겸, 윤방 등을 등용하며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 보자!라고 했지만 결과는 알다시피로 병자호란으로 인한 삼배구고두례로 대표되는 삼전도의 치욕이었다.
이후에 나라를 이끌 의욕을 잃었는지 재위 후반에 접어들면 심기원과 김자점을 주축으로 해서 무능하고 부패한 공신들로 하여금 나라를 이끌고 갔다.
심기원과 김자점은 무능했지만 아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총애를 얻어 권신이 됐고, 이들 이외에 주변에 예스맨들만 채우려 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광해군 시절 못지 않은 권신 정치를 펼쳤는데, 막상 심기원과 김자점은 나중에 자기 이익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하며 역모를 일으키다가 처형됐다.
인조는 신하들이 반대하는 추숭에 매달릴 정도로 권력에 집착하곤 그 권력을 즐기는 데에만 썼을 뿐 2차례의 호란을 초래했고, 가정적으로는 맏아들 소현세자를 박대했고 맏며느리 민회빈 강씨를 손수 죽이며 손자들에게 "그 새끼 같은 것들을 왜 신경 써야 되냐"라고 욕하며 죽였고, 강씨 일가까지 박살내는 등 반성을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두고두고 까인다.
과거 서인들이 주류이던 시절에는 반정을 일으켜 즉위하고 침략자 청에 맞서 싸웠다는 명분으로 인조대왕이라고 칭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사실 이 때도 전반적인 평가는 좋지 않았다.
당장 위에서 나왔듯이 인조가 총애했던 심기원과 김자점의 경우에는 자기 권력이 견제받자 바로 역모를 일으켜서 정국을 불안정하게 했고, 결국에는 이 두 사람의 역모 사건으로 인해 인조가 세운 공신들의 상당수가 갈려나가고, 그가 만든 정책은 전면 재검토되어 그나마 쓸만한 것들만 추가됐다.
전반적인 치세가 치욕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본인이 문제가 많은 군주임에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다만 인조는 운이 좋았다.
백성 50만이 요동으로 끌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어도, 자식들이 볼모로 끌려 갔어도, 서인 정권이 북인의 권신들과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을 깔끔하게 정리를 했기 때문에 국내외에 인조가 가진 권력 탈취를 도모하는 세력이 없었다.
제 식구 챙기기와 우유부단함으로 3번이나 나라를 결단을 낸 암군이면서 자기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장남 소현세자ㆍ강빈과 손자들을 핍박하고 죽게 만든 패륜적인 면과 백성들 입장에선 광해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군주였던 인조는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조선이 빨리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날린 군주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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